내용 바로가기

CLOSE


KUK SOOL WON

국술원 소식

패턴이미지

투명이미지
HOME > 국술원 소식 > 언론보도 내용



언론보도 내용

이 표는 게시물 상세보기를 나타낸 표입니다.
제 목 [최보식이 만난 사람] "촌놈이 아는 것도 별로 없고 먹고살려고 武術 한 것이 이렇게 됐지요"
작성일 2018년 10월 16일 조회 57
첨부파일 없음
내 용


[최보식이 만난 사람] "촌놈이 아는 것도 별로 없고 먹고살려고 武術 한 것이 이렇게 됐지요"

조선일보
  • 최보식 선임기자  
  •  

    입력 2018.10.15 03:12

    외국 수련생 450만명 '글로벌 武術 기업'의 창시자… 서인혁 국술원 총재

    지난 7일 멕시코만(灣)에 접한 미국 텍사스주 갤버스턴(Galveston). 이 해안 도시의 한 컨벤션센터에서 '세계국술협회 지역 토너먼트'가 열렸다. 한국 무예인 국술(國術) 수련자 1600명이 출전했다.

    미국인들만 모인 공간에서 나는 이렇게 많은 태극기를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이들이 입은 도복의 오른쪽 가슴에 성조기가 아닌 태극기를 달고 있었다. 이들은 나를 한국에서 온 '국술 유단자'로 잘못 알았던 것 같다. 우리말로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했고, 악수할 때면 "예, 서어(Sir)" 하며 두 손을 내밀며 고개 숙였다. 시합은 "차렷" "시작"이라는 구령을 썼고, 판정이 내려질 때면 무릎 꿇은 뒤 큰절을 했다. 이는 아메리칸 스타일이 아니었다.

    세계 대제국인 미국 땅에서 어떻게 이런 광경이 연출될 수 있을까. 이 놀라운 세상을 만들어낸 이는 서인혁(79) 국술원 총재다. 한 개인이 만든 무술이 미국·영국·프랑스 등 전 세계 450만명의 수련자를 가진 세계 무술이 됐다. 브랜드, 무술 체계, 교본, 도복 디자인 등이 특허 등록돼 있다. 본부와 지부, 도장으로 이어지는 '프랜차이즈 무술 기업 체제'를 갖추고 있다. 태권도·쿵후·가라테 등 어떤 무술 단체도 세계적으로 이런 통일된 조직과 특허권을 가진 적이 없다.

    서인혁 총재는 “사범들이 다 잘살도록 만드는 데 애를 썼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노벨평화상 본선 후보에 들어 있었다.
    서인혁 총재는 “사범들이 다 잘살도록 만드는 데 애를 썼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노벨평화상 본선 후보에 들어 있었다. /미국 텍사스주 갤버스턴=최보식 기자
    넉 달 전쯤 한 통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국술에 대해 전혀 몰랐다. 서인혁 총재의 동생인 서인주(국술원 한국지부 회장)씨라는 분이었다.

    "오현 큰스님을 찾아뵙고 '제 형님이 올해 노벨평화상 후보 본선에 올라갔다'고 말씀드리니 '인터뷰는 꼭 최 기자가 해야 하니 내가 한번 말을 넣어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나흘 뒤 큰스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오현 스님은 지난 5월 돌아가신 설악산 신흥사의 조실(祖室)을 말한다. 최근 몇 년간 연락하거나 만난 적은 없었는데 돌아가시기 직전에 그랬다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서인혁 총재는 2007년 오현 스님이 주재하던 '만해대상 특별상'을 받은 인물이었다. 또 올해 노벨평화상 후보 331인 중 그 이름이 들어 있었다. 미국의 로펌 변호사 등이 추천했고, 그 사유는 '지구촌 사람 450만명에게 분쟁과 혼돈 대신 평화와 선함을 채워넣었다'로 되어 있었다.

    이런 연유로 세계국술협회의 초청을 받고 미국으로 갔다. 서인혁 총재는 남방셔츠에 양복바지를 올려 입고는 낡은 가죽 허리띠를 둘러맨 모습이 영락없이 1970년대 시골 노인 같았다. 게다가 160cm 남짓한 단구(短軀)였다.

    "촌놈처럼 보이지요. 나는 꾸미는 게 싫어요. 그러니 체면을 갖춰야 하는 한국에서는 못 사는 거요. 대회를 할 때만 회원들을 위해 넥타이를 매지요."

    ―어떻게 덩치 큰 서양인의 무술 스승이 될 수 있었습니까?

    "작은 체구로 큰 서양인을 제압하면 더 극적이지요."

    그는 경북 군위군에서 농사짓는 집안의 5남 4녀 중 넷째로 출생했다. 조부가 무예의 기본을 가르쳤지만 기술 연마는 그의 독학으로 이뤄졌다.

    "내게 그런 끼가 있었어요. 하루종일 혼자서 연마했어요. 대구상고에 진학했지만 공부는 뒷전이고 고유 무술이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문중과 사찰을 찾아갔어요. 전국을 다니며 무술 잘하는 사람들과 기예를 겨뤄봤어요. 혹 건달들이 싸움을 걸어오면 상대도 하고요. 두들겨맞은 적도 많지요. 하지만 내가 얼마나 피하며 쓰러질 수 있나 그것도 연구해야지요. 실전연습이 된 거죠."

    ―가장 인상적인 무술 고수는 누구였습니까?

    "날아다닌다는 고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보면 그도 아니었고…, 일제 강점기 때 말살된 탓인지 한국 고유 무술이 내놓을 게 없다는 걸 알았어요. 그때는 태권도가 없었어요(1958년 최홍희씨가 대한태권도협회를 만듦). 그래서 한국 무술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거죠. 14세부터 19세까지 그걸 했지요. 못 먹고 살던 때라 일찍 철이 들었지요. 당시 하루 스무 시간씩 수련했지요. 팔이 단단한 돌기둥 같아 교복 소매가 터질 것 같았어요."

    그는 670개 경혈과 164개 관절, 근육을 먼저 연구했다고 한다. 품새(形)는 농부가 농기구를 움직이는 동작을 본뜨거나 한자의 파자(破字) 형태로 만들었다. 다른 무술의 장점을 취했고 '무예도보통지' 등에 나오는 동작도 참고했다.

    "국술을 270기법과 3608수(手)로 체계화했지요. 그 뒤로 지금까지 무술 교본을 네 권이나 냈어요. 한국에서 통용되는 기예 중 7할이 내 교본에서 나왔을 겁니다."

    고교 졸업 후 부산에 내려가 도장을 차렸다. 소문이 나자 전국에서 무술 한다는 사람들이 그의 밑으로 들어왔다. 육군에 보급된 특공무술의 창시자인 장수옥씨도 그의 제자였다. 1960년대 경상도와 전라도에는 770개의 국술 도장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회비나 심사비가 얼마 안 됐어요. 협회본부는 밥 먹고 살기 어려웠어요. 당시 경남고 졸업반인 제자가 내 사정을 알고 학생 76명을 데리고 온 걸 잊지 못해요. 햇수를 따져보면 김무성·문재인씨가 당시 2학년·1학년이었을 겁니다."

    '세계국술협회 지역 토너먼트' 대회 사진
    1975년 주한미군 제자의 권유로 먹고살기 위해 미국행을 택했다. 샌프란시스코의 백인 동네에 도장을 차렸다. 가라테와 쿵후가 풍미하던 시절이었다. '국술원'이라는 명칭 때문에 중국 식당으로 오해했다. 3주 동안 한 명의 등록도 없었다. 제자들과 함께 거리와 공원에서 시범을 보이면서 소문이 났다.

    "한국에서는 '나보다 센 놈이 없다'고 뻣뻣했죠. 도장을 차려놓으니 덩치가 산만 한 놈들이 와서 한판 붙자고 시비를 겁니다. 한국 같았으면 반쯤 죽여놓았겠지만, 미국에 온 뒤로는 '저놈을 꼭 내 제자로 만들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바뀌었지요. 몇 수 만에 끝내면 정말 제자가 돼요."

    ―체구가 크고 완력이 센 미국인에게 그게 가능합니까?

    "싸움은 내가 도사니까. 사람 뼈가 얼마나 약한 줄 압니까. 손가락 하나로도 주저앉힐 수 있지요. 2m 되는 미국 친구가 발길질하는 순간 주먹으로 정강이뼈에 살짝 대니 5분간 뒹굴었어요. 영국 BBC방송에 출연했을 때 아나운서가 갑자기 뒤에서 나를 덮치며 '이럴 때 어떻게 하느냐'고 해요. 한 수를 쓰자 그가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쳤어요. 그 방송 영상이 1년간 떠돌아다녔지요."

    그는 미국 내 무술 잡지 '인사이트 쿵후'에서 '올해의 인물'로, 샌프란시스코 이그제미나와 휴스턴 크로니클 등의 일간지에서는 '동양에서 온 최고의 무술가'로 소개됐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도장은 성황을 이뤘다.

    ―다른 무술의 고수가 쳐들어와 한판 대결을 벌이는 소위 '도장 깨기'는 없었습니까?

    "영화에서나 그렇지, 무술 하는 사람들은 그런 짓 안 합니다. 서로 존중하죠. 말로 해도 되는데 서로 피해 볼 일을 왜 합니까. 공갈도 그럴듯하게 치면 됩니다(웃음). 어느 자리에서 가라테 8단인 일본 고수를 만났지요. 내가 '운동하지 않은 한국 사람이 일본 유단자를 이긴 적이 많다'고 하니까, '예, 서어' 하더군요."

    ―실전에서는 어떤 무술이 강한가요?

    "어떤 무술이든 얼마나 수련했느냐에 따라 다르죠. 일본 무술은 앞으로만 치고 들어가는 전투적 실용성이 있어요. 대신 회전이나 측면 공격의 유연성이 떨어지죠. 중국 무술은 현란하고 기교가 많아요. 보기에는 예술적이기까지 하지만 실용성이 좀 모자라죠."

    그는 미국 전역에 산재한 도장을 자동차로 돌며 세미나·강습회 등을 열어 기술을 전수했다. 일종의 출장 서비스를 통해 조직을 강화했다. 현재 미국에서만 도장이 340여 개로 늘어났다.

    "사범들에게 '먼 지역까지 도장을 선전할 필요가 없다. 5마일 안에서만 자신의 영역을 만들면 된다. 사범의 사람됨이 소문나면 지역 주민들이 찾아온다. 백만번 절을 해보면 네 몸이 저절로 다듬어진다. 상대방을 존중하면 자신이 누구인지 쉽게 알게 된다'고 말하지요."

    ―선생은 젊었을 때 그렇게 했나요?

    "그때는 남한테 안 지려고 했지만 그게 바보 같았던 거죠. 나는 늘 몸가짐을 조심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국술원 총재는 회원들의 우상입니다. 내가 허튼짓하면 국술원 조직이 흔들려요. 사범이나 회원들이 초청해도 저녁 자리에는 안 어울립니다. 공적인 것만 하고 사적인 관계를 안 만들지요. 그러니까 외롭지요."

    2008년부터 미국 법에 의해 프랜차이즈 기업 체제를 갖췄다. 각 도장에 기술과 심사 체계, 수련 프로그램 등을 제공하면서 가맹료(심사비·회원비)를 받는 식이다.

    "나는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조직을 만들고 싶었지요. 무술을 배운 미국인들은 도장을 열면 딴살림을 차려요. 원조(元祖)가 어디에 있는지 상관없는 거죠. 지금 미국인의 태권도, 미국인의 가라테, 미국인의 쿵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지식재산권을 등록하기 시작한 거죠."

    ―어떻게 이런 비즈니스를 할 줄 알았습니까?

    "나야 무술만 했지 국술원의 행정·운영·관리는 아내가 도맡아 했지요. 제자 중 로펌 변호사와 회계사들이 '지식재산권과 디자인 특허 등록을 빨리하라'고 해준 충고를 따른 거죠. 법률 비용이 엄청났지요. 수입을 모두 변호사에게 갖다 바치고도 막대한 부채를 졌어요. 결과적으로 그게 옳았지요."

    국술원은 수련자에게 사용되는 도복, 장검, 부채, 단봉, 호구 등 무예용품을 독점 공급한다. 이 수입은 엄청난 것이다.

    "무예용품은 값싼 중 국이나 동남아가 아니라 모두 한국에서 만들어옵니다. 이는 내 마음입니다. 나는 사범들이 다 잘살도록 만드는 데 애를 썼지요. 공정한 분배를 합니다. 무예용품 판매 수익을 사범과 반반씩 나눕니다. 잘살게 해줘야 조직에 충성하고 베풀 수 있으니까요."

    헤어질 때 그는 "시골 촌놈이 아는 것도 별로 없었고 먹고살기 위해 무술을 한 것이 이렇게 됐지요"라고 말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0/14/2018101401608.html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0/14/2018101401608.html
     

    이 표는 이전글,다음글를 나타낸 표입니다.
    이전글 '2017년 국술원 전국선수권대회 열려'

    • 콜센터

      국술원 협회 콜센터

      전화
      053 - 942 - 4414
      팩스
      053 - 942 - 4415
      이메일
      kuksooler@hanmail.net
      운영시간
      09 : 00 ~ 18 : 00
    • 세계 국술원

      세계 국술원

      전화
      281 - 255 - 2550
      팩스
      281 - 255 - 2548
      20275 FM 2920 TOBALL TX 77377
    • 세계를 재패한 서인혁의 성공신화

      세계를 재패한

      서인혁의 성공신화

      국사님 평전 전국 서점에서 판매중